지금은 한해 3백만명이 찾는 관광 명소지만 경복궁은 우리네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조선 왕조 얘기만은 아닙니다. 일제를 거치고 군사정권을 지나 오늘에 오기까지. 그 신산(辛酸)하고 부침 심한 시절이 경복궁엔 다 있습니다.
어렵사리 열 곳을 추렸습니다. 물론 이것만으로 경복궁의 모든 것을 설명하진 못합니다. 다른 가볼 만한 곳도 많으니까요. 모처럼 찾은 경복궁에서 멍하니 먼지 쌓인 단청이나 구경할 수는 없겠지요?
꼭 명심할 게 있습니다. 궁궐은 '아는 만큼 보이는' 법입니다. 미리 준비해가세요. 또 하나, 눈에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닙니다. 옛날로 돌아가 '상상'을 하세요. 그게 궁궐 문을 여는 열쇠랍니다.
1.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 - 광화문
1968년 대한뉴스의 한 장면. "국내 건축 기술이 신기원을 이룩했습니다. 철근과 시멘트 콘크리트로 광화문의 옛 모습을 재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기뻐해 주십시오, 국민 여러분." 광화문은 공고히 다진 시멘트 콘크리트 구조물이다. 쉽게 말하자면 아파트처럼 지었다. 석축 위의 문루(門樓)는 보이는 것과 달리 나무가 아니다. 의심스러우면 바짝 다가가 보라. 유성 페인트로 위장한 처마 사이사이 콘크리트 모서리가 삐죽이 나와 있다. 어처구니없는 이 사실이 68년엔 자랑스러운 뉴스였다.
대표적인 국가 상징인 광화문. 그래서인지 이 철골 구조물은 굴곡 심한 민족사를 많이 닮았다. 일제는 어떻게든 광화문을 허물려고 했다. 조선의 법궁(法宮) 경복궁의 정문이기 때문이다. 결국 일제는 1926년 광화문을 경복궁 동편으로 옮겼다.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입구쯤이다.
그리고 한국전쟁. 문루는 불타고 석축은 총알받이가 됐다. 임진왜란 이후로 두번째 소실. 그렇게 방치되다 68년 원래의 자리에 철근을 쌓아 올렸다. 그러나 그때도 광화문은 원래의 자리를 찾지 못했다. 광화문의 축을 경복궁에 맞춘 게 아니라 당시 중앙청(옛 조선총독부 청사)에 맞췄기 때문이다. 그 결과 본래의 축과 5.6도 어긋나 세워졌다. 광화문을 등지고 서서 궁궐 안을 바라보자. 광화문과 궁궐 안은 비뚤어진 현대사만큼 어긋나 있다. 자투리 상식 하나. 지금 광화문의 한글 현판은 누구의 필체일까.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현재 정부는 새 현판 제작을 포함해 광화문의 구조와 위치 모두를 복원하는 정비 사업을 추진 중이다.
2. 경복궁의 두 모습 - 중앙박물관
경복궁을 둘러보기 전에 꼭 들러야 할 곳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지하 1층의 경복궁 대형 모형. 1888년 재건됐을 때와 1945년 해방 직후의 몰골이 나란히 누워 있다. 7천칸이 넘는 전각(殿閣)이 빼곡이 들어섰던 고종 때의 위용에 한번 놀라고, 일제가 얼마나 철저히, 그리고 잔인하게 유린했는지 다시 한번 놀란다. 45년 모형에서 광화문이 어디에 붙어있는지 한번 확인해 볼 것.
3. 돌아온 왕조의 존엄 - 근정전
정확히 3년10개월 만이다. 기나긴 보수 공사 끝에 지난달 14일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국보 223호. 경복궁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다. 2층짜리 돌난간을 합쳐 약 27m. 아파트 8~9층 높이다. 뜻밖의 사실 하나. 조선시대 이 건물은 주로 닫혀 있었다. 왕의 즉위식이나 외국 사신 접견 등 국가의 중요 행사만 여기서 치렀다. 외려 요즘은 날마다 열려 있다. 관광객을 위해서. 물론 출입은 안 된다. 가능하다면 천장의 용 그림을 올려다 볼 것. 목을 길게 빼는 수고를 감내할 만하다. 왕의 평소 집무실은 근정전 바로 뒤의 사정전(思政殿)이다.
통한의 한 장면. 근정전 용상에 왕이 아닌 이가 앉은 적이 한번 있다. 1914년 일제강점 5주년 기념식의 일환으로 경복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가 열렸을 때.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초대 조선 총독이었다.
4. 북한 사람이 고개 숙인 곳 - 수정전
수정전은 세종 때 집현전(集賢殿)이 설치됐던 곳이다. 세종 25년(1443년) 훈민정음이 창제된 한글의 메카다. 하지만 요즘 모든 관람객이 그냥 스쳐 지나간다. 그럴 만도 하다. 달랑 서 있는 목조 건물은 사진 배경으로도 약하다. 그런데 이곳에서 머리를 조아린 이들이 있다. 북한 사람들이다. 한글이 여기서 만들어졌다는 설명에 모두가 진지해졌다고 한다. 이들은 사정전 앞의 앙부일구(仰釜日咎.해시계) 곁에서도 한동안 떠나지 않았다.
5. 절대 권력의 향연장 - 경회루
인공 연못 위에 올린 화려한 정자. 24개의 돌기둥이 24절기를 상징하는 등 심오한 철학이 담긴 누각이다. 쓰임새는 사신 접대와 왕의 향연장. 국보 224호다. 경회루에서 아예 살다시피 한 이는 역시 연산군이다. 경회루 왼쪽에 '만세산'이란 섬을 쌓고 금.은.비단으로 장식한 뒤 '초호화 물놀이'를 즐겼다. 당시 기생 집단 '흥청'과 밤낮으로 놀았다고 해서 흥청망청이란 말이 나왔다고.
현대사에서도 경회루는 여전히 절대 권력의 향연장이었다. 79년 12.12 사태 직후 전두환씨가 칵테일 파티를 벌였다는 얘기도 있다.
6. 경회루 옆 정자의 정체 - 하향정
경회루 뒤편 담벼락에 조그만 육각정이 붙어있다. 한둘 들어가면 꽉 찰 것 같다. 뭘까. 경회루를 지키는 초병의 자리일까. 이 정자는 조선 왕조와 상관없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개인 낚시터였다. 그러고 보니 청와대(당시는 경무대)가 지척이다. 연못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물고기가 있다. 적적한 밤이면 예서 낚싯대를 기울였다고 한다. 참고로 하나 더. 경회루 연못엔 동용(銅龍)이 있다. 97년 연못의 물을 뺐을 때 발견됐다. 다시 물에 넣었는데 바로 그 곳이 하향정 왼편이다.
7. 왕비의 한 - 아미산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왕비의 침소였던 교태전(交泰展)의 후원이 어떤 연유로 중국 3대 영산(靈山) 중 하나의 이름을 땄을까. 사실 규모도 크지 않다. 4개의 단(段)을 쌓아 꽃나무를 심은 게 전부다. 경회루 연못에서 나온 흙을 여기에 쌓았다. 특이하다면 외려 굴뚝이다(보물 811호). 화려한 문양이 인상적이다.
알고 보니 사연이 깊다. 아미산 뒤로 서 있는 게 백악산(속칭 북악산). 백두산부터 백두대간을 타고 뻗어 내린 정기가 북한산을 거쳐 백악까지 이어진다. 문제는 정기가 백악에서 그친다는 것. 그래서 일부러 산을 올렸다. 끊어진 정기를 궁궐까지, 다시 말해 왕비의 침소까지 잇기 위해. 그래야 백두의 정기를 내려 받은 왕세자를 생산할 수 있으니까. 아미산 감상 포인트 대공개. 교태전 계단의 7할쯤에 올라 아미산을 바라보라. 그 눈 높이가 옛날 교태전에 앉아 내다보던 왕비의 눈 높이, 그 수심 깊던 시선의 시작점이다.
8. 굴뚝은 예술·과학이다 - 자경전
고종이 왕위에 오르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조대비의 거처가 자경전이다. 그만큼 화려하고 웅대하다. 심지어 굴뚝도 화려하다. 십장생 문양을 새겨 '십장생(十長生) 굴뚝(사진)'이라 불린다. 보물 810호다. 궁궐도 여느 민가처럼 온돌이다. 고개를 조금만 낮추면 아궁이를 볼 수 있다. 그런데 굴뚝이 안 보인다. 궁궐의 굴뚝은 건물에 붙어 있지 않다. 한참 뒤편의 담에 붙어 있다. 혹여 왕족이 연기에 질식되지 않을까 저어해 연통을 지하에 묻고 온돌과 굴뚝을 분리한 것이다. 굴뚝 기와 위의 구멍에서 연기가 나온다. 십장생 굴뚝의 오른쪽 벽면에 박쥐 문양이 있다. '왜 하필 박쥐냐'고 한다면 어릴 적 이솝우화의 과도한 영향을 탓할 수밖에. 박쥐는 동양에서 복(福)의 상징이다.
9. 아! 명성황후 - 명성황후 시해터
그날도 바람이 모질었을까.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인 깡패들이 명성황후를 살해했을 때 사실 조선의 역사도, 경복궁의 역사도 거기서 끝이 났다. 살해 위험에 시달리던 고종은 넉달 뒤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을 감행했고 그 뒤로 경복궁은 왕이 국사를 보는 기능을 상실했다.
명성황후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다. 그날 밤 그들은 왕비의 시신을 ‘녹산’으로 옮겨 불태웠고 잔해를 향원정 일대에 뿌렸다. 시해터는 그래서인지 여전히 을씨년스럽다. 밤낮으로 경복궁을 순찰하는 청와대 경비 경찰도 녹산 일대의 야간 순찰은 꺼린다고 한다.
오늘도 노란 꽃다발이 놓여있는 명성황후 순국 숭모비. 비석 뒷면에 건립위원 명단이 새겨있다. 그 가운데 유독 한 이름만 손때가 심하다. 뜯어내려다 포기한 흔적이 보인다. 누구의 것인지는 직접 확인할 것. 대표적인 친일 여류 문인의 이름을 1961년 숭모비 건립 위원 명단에서 찾을 수 있다.
10. 되풀이되는 침탈의 현장 - 태원전(太元殿) 자리
어떤 곡절이 숨었는지 여긴 군대가 계속 주둔해왔다. 일본군이 물러난 뒤엔 미군, 그리고 한국군까지. 97년이 되서야 군대가 철수했다. 바로 뒤가 청와대란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태원전은 과거 ‘빈전’(殯展)이 마련됐던 신성한 곳이다. ‘빈전’은 ‘빈소’의 높임말. 왕이 죽으면 능으로 옮기기 전까지 시신을 모시고 의례를 치렀다. 바로 그 곳에 군대가 진을 쳤다.
이곳은 여전히 공사 중이다. 접근도 금지됐다. 멀찍이 지켜봐야 한다. 그저 시시한 공사장 같지만 꼭 그렇지 않다.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에서 50미터쯤 앞 목재가 잔뜩 쌓여있는 곳. 그곳을 주시하라. 1980년 수도경비사단 소속 30경비단의 본부 자리. 12·12를 공모한 바로 그 현장이다. 왜 여기는 복원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경복궁 이용 방법]
▶가는길=지하철 3호선(경복궁역 5번 출구), 5호선(광화문역 2번 출구)
▶입장 시간=3~10월(오전 9시~오후 6시), 11~2월(오전 9시~오후 5시). 매주 화요일 휴관.
▶관람료= 19~64세:3천원,7-18세 1천5백원, 65세 이상과 6세 이하는 무료.
▶홈페이지= (http://gbg.cha.go.kr/)
▶안내 프로그램=하루 6~8차례 안내 프로그램 무료 운영 중. 영어.일어.중국어 등 외국어 안내도 가능. 경복궁 안내소(02-723-4283), 한국청년연합회(02-393-1355), 우리궁궐지킴이(02-723-4206).
어렵사리 열 곳을 추렸습니다. 물론 이것만으로 경복궁의 모든 것을 설명하진 못합니다. 다른 가볼 만한 곳도 많으니까요. 모처럼 찾은 경복궁에서 멍하니 먼지 쌓인 단청이나 구경할 수는 없겠지요?
꼭 명심할 게 있습니다. 궁궐은 '아는 만큼 보이는' 법입니다. 미리 준비해가세요. 또 하나, 눈에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닙니다. 옛날로 돌아가 '상상'을 하세요. 그게 궁궐 문을 여는 열쇠랍니다.
1.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 - 광화문
1968년 대한뉴스의 한 장면. "국내 건축 기술이 신기원을 이룩했습니다. 철근과 시멘트 콘크리트로 광화문의 옛 모습을 재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기뻐해 주십시오, 국민 여러분." 광화문은 공고히 다진 시멘트 콘크리트 구조물이다. 쉽게 말하자면 아파트처럼 지었다. 석축 위의 문루(門樓)는 보이는 것과 달리 나무가 아니다. 의심스러우면 바짝 다가가 보라. 유성 페인트로 위장한 처마 사이사이 콘크리트 모서리가 삐죽이 나와 있다. 어처구니없는 이 사실이 68년엔 자랑스러운 뉴스였다.
대표적인 국가 상징인 광화문. 그래서인지 이 철골 구조물은 굴곡 심한 민족사를 많이 닮았다. 일제는 어떻게든 광화문을 허물려고 했다. 조선의 법궁(法宮) 경복궁의 정문이기 때문이다. 결국 일제는 1926년 광화문을 경복궁 동편으로 옮겼다.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입구쯤이다.
그리고 한국전쟁. 문루는 불타고 석축은 총알받이가 됐다. 임진왜란 이후로 두번째 소실. 그렇게 방치되다 68년 원래의 자리에 철근을 쌓아 올렸다. 그러나 그때도 광화문은 원래의 자리를 찾지 못했다. 광화문의 축을 경복궁에 맞춘 게 아니라 당시 중앙청(옛 조선총독부 청사)에 맞췄기 때문이다. 그 결과 본래의 축과 5.6도 어긋나 세워졌다. 광화문을 등지고 서서 궁궐 안을 바라보자. 광화문과 궁궐 안은 비뚤어진 현대사만큼 어긋나 있다. 자투리 상식 하나. 지금 광화문의 한글 현판은 누구의 필체일까.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현재 정부는 새 현판 제작을 포함해 광화문의 구조와 위치 모두를 복원하는 정비 사업을 추진 중이다.
2. 경복궁의 두 모습 - 중앙박물관
경복궁을 둘러보기 전에 꼭 들러야 할 곳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지하 1층의 경복궁 대형 모형. 1888년 재건됐을 때와 1945년 해방 직후의 몰골이 나란히 누워 있다. 7천칸이 넘는 전각(殿閣)이 빼곡이 들어섰던 고종 때의 위용에 한번 놀라고, 일제가 얼마나 철저히, 그리고 잔인하게 유린했는지 다시 한번 놀란다. 45년 모형에서 광화문이 어디에 붙어있는지 한번 확인해 볼 것.
3. 돌아온 왕조의 존엄 - 근정전
정확히 3년10개월 만이다. 기나긴 보수 공사 끝에 지난달 14일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국보 223호. 경복궁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다. 2층짜리 돌난간을 합쳐 약 27m. 아파트 8~9층 높이다. 뜻밖의 사실 하나. 조선시대 이 건물은 주로 닫혀 있었다. 왕의 즉위식이나 외국 사신 접견 등 국가의 중요 행사만 여기서 치렀다. 외려 요즘은 날마다 열려 있다. 관광객을 위해서. 물론 출입은 안 된다. 가능하다면 천장의 용 그림을 올려다 볼 것. 목을 길게 빼는 수고를 감내할 만하다. 왕의 평소 집무실은 근정전 바로 뒤의 사정전(思政殿)이다.
통한의 한 장면. 근정전 용상에 왕이 아닌 이가 앉은 적이 한번 있다. 1914년 일제강점 5주년 기념식의 일환으로 경복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가 열렸을 때.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초대 조선 총독이었다.
4. 북한 사람이 고개 숙인 곳 - 수정전
수정전은 세종 때 집현전(集賢殿)이 설치됐던 곳이다. 세종 25년(1443년) 훈민정음이 창제된 한글의 메카다. 하지만 요즘 모든 관람객이 그냥 스쳐 지나간다. 그럴 만도 하다. 달랑 서 있는 목조 건물은 사진 배경으로도 약하다. 그런데 이곳에서 머리를 조아린 이들이 있다. 북한 사람들이다. 한글이 여기서 만들어졌다는 설명에 모두가 진지해졌다고 한다. 이들은 사정전 앞의 앙부일구(仰釜日咎.해시계) 곁에서도 한동안 떠나지 않았다.
5. 절대 권력의 향연장 - 경회루
인공 연못 위에 올린 화려한 정자. 24개의 돌기둥이 24절기를 상징하는 등 심오한 철학이 담긴 누각이다. 쓰임새는 사신 접대와 왕의 향연장. 국보 224호다. 경회루에서 아예 살다시피 한 이는 역시 연산군이다. 경회루 왼쪽에 '만세산'이란 섬을 쌓고 금.은.비단으로 장식한 뒤 '초호화 물놀이'를 즐겼다. 당시 기생 집단 '흥청'과 밤낮으로 놀았다고 해서 흥청망청이란 말이 나왔다고.
현대사에서도 경회루는 여전히 절대 권력의 향연장이었다. 79년 12.12 사태 직후 전두환씨가 칵테일 파티를 벌였다는 얘기도 있다.
6. 경회루 옆 정자의 정체 - 하향정
경회루 뒤편 담벼락에 조그만 육각정이 붙어있다. 한둘 들어가면 꽉 찰 것 같다. 뭘까. 경회루를 지키는 초병의 자리일까. 이 정자는 조선 왕조와 상관없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개인 낚시터였다. 그러고 보니 청와대(당시는 경무대)가 지척이다. 연못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물고기가 있다. 적적한 밤이면 예서 낚싯대를 기울였다고 한다. 참고로 하나 더. 경회루 연못엔 동용(銅龍)이 있다. 97년 연못의 물을 뺐을 때 발견됐다. 다시 물에 넣었는데 바로 그 곳이 하향정 왼편이다.
7. 왕비의 한 - 아미산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왕비의 침소였던 교태전(交泰展)의 후원이 어떤 연유로 중국 3대 영산(靈山) 중 하나의 이름을 땄을까. 사실 규모도 크지 않다. 4개의 단(段)을 쌓아 꽃나무를 심은 게 전부다. 경회루 연못에서 나온 흙을 여기에 쌓았다. 특이하다면 외려 굴뚝이다(보물 811호). 화려한 문양이 인상적이다.
알고 보니 사연이 깊다. 아미산 뒤로 서 있는 게 백악산(속칭 북악산). 백두산부터 백두대간을 타고 뻗어 내린 정기가 북한산을 거쳐 백악까지 이어진다. 문제는 정기가 백악에서 그친다는 것. 그래서 일부러 산을 올렸다. 끊어진 정기를 궁궐까지, 다시 말해 왕비의 침소까지 잇기 위해. 그래야 백두의 정기를 내려 받은 왕세자를 생산할 수 있으니까. 아미산 감상 포인트 대공개. 교태전 계단의 7할쯤에 올라 아미산을 바라보라. 그 눈 높이가 옛날 교태전에 앉아 내다보던 왕비의 눈 높이, 그 수심 깊던 시선의 시작점이다.
8. 굴뚝은 예술·과학이다 - 자경전
고종이 왕위에 오르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조대비의 거처가 자경전이다. 그만큼 화려하고 웅대하다. 심지어 굴뚝도 화려하다. 십장생 문양을 새겨 '십장생(十長生) 굴뚝(사진)'이라 불린다. 보물 810호다. 궁궐도 여느 민가처럼 온돌이다. 고개를 조금만 낮추면 아궁이를 볼 수 있다. 그런데 굴뚝이 안 보인다. 궁궐의 굴뚝은 건물에 붙어 있지 않다. 한참 뒤편의 담에 붙어 있다. 혹여 왕족이 연기에 질식되지 않을까 저어해 연통을 지하에 묻고 온돌과 굴뚝을 분리한 것이다. 굴뚝 기와 위의 구멍에서 연기가 나온다. 십장생 굴뚝의 오른쪽 벽면에 박쥐 문양이 있다. '왜 하필 박쥐냐'고 한다면 어릴 적 이솝우화의 과도한 영향을 탓할 수밖에. 박쥐는 동양에서 복(福)의 상징이다.
9. 아! 명성황후 - 명성황후 시해터
그날도 바람이 모질었을까.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인 깡패들이 명성황후를 살해했을 때 사실 조선의 역사도, 경복궁의 역사도 거기서 끝이 났다. 살해 위험에 시달리던 고종은 넉달 뒤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을 감행했고 그 뒤로 경복궁은 왕이 국사를 보는 기능을 상실했다.
명성황후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다. 그날 밤 그들은 왕비의 시신을 ‘녹산’으로 옮겨 불태웠고 잔해를 향원정 일대에 뿌렸다. 시해터는 그래서인지 여전히 을씨년스럽다. 밤낮으로 경복궁을 순찰하는 청와대 경비 경찰도 녹산 일대의 야간 순찰은 꺼린다고 한다.
오늘도 노란 꽃다발이 놓여있는 명성황후 순국 숭모비. 비석 뒷면에 건립위원 명단이 새겨있다. 그 가운데 유독 한 이름만 손때가 심하다. 뜯어내려다 포기한 흔적이 보인다. 누구의 것인지는 직접 확인할 것. 대표적인 친일 여류 문인의 이름을 1961년 숭모비 건립 위원 명단에서 찾을 수 있다.
10. 되풀이되는 침탈의 현장 - 태원전(太元殿) 자리
어떤 곡절이 숨었는지 여긴 군대가 계속 주둔해왔다. 일본군이 물러난 뒤엔 미군, 그리고 한국군까지. 97년이 되서야 군대가 철수했다. 바로 뒤가 청와대란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태원전은 과거 ‘빈전’(殯展)이 마련됐던 신성한 곳이다. ‘빈전’은 ‘빈소’의 높임말. 왕이 죽으면 능으로 옮기기 전까지 시신을 모시고 의례를 치렀다. 바로 그 곳에 군대가 진을 쳤다.
이곳은 여전히 공사 중이다. 접근도 금지됐다. 멀찍이 지켜봐야 한다. 그저 시시한 공사장 같지만 꼭 그렇지 않다.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에서 50미터쯤 앞 목재가 잔뜩 쌓여있는 곳. 그곳을 주시하라. 1980년 수도경비사단 소속 30경비단의 본부 자리. 12·12를 공모한 바로 그 현장이다. 왜 여기는 복원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경복궁 이용 방법]
▶가는길=지하철 3호선(경복궁역 5번 출구), 5호선(광화문역 2번 출구)
▶입장 시간=3~10월(오전 9시~오후 6시), 11~2월(오전 9시~오후 5시). 매주 화요일 휴관.
▶관람료= 19~64세:3천원,7-18세 1천5백원, 65세 이상과 6세 이하는 무료.
▶홈페이지= (http://gbg.cha.go.kr/)
▶안내 프로그램=하루 6~8차례 안내 프로그램 무료 운영 중. 영어.일어.중국어 등 외국어 안내도 가능. 경복궁 안내소(02-723-4283), 한국청년연합회(02-393-1355), 우리궁궐지킴이(02-723-4206).
조선의 중심이 한양이었다면 그 한양의 중심은 단연 궁궐이다. 북악산과 인왕산을 배경으로 자리한 경복궁은 서울의 다섯 궁궐 가운데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조선의 정궁이다. 녹음을 머금은 봄의 경복궁은 햇살만큼이나 화사해서 좋다. <쏭 내관의 재미있는 궁궐 기행>의 저자 송용진 씨와 함께 경복궁의 정취에 빠져보기로 했다. |
[ 외전 ] 위엄과 생동감이 살아 숨쉰다, 근정전·사정전 광화문으로 다가가니 경복궁을 호위하듯 양옆에 해치가 눈을 부라리고 앉았다. 해치는 해태라고도 불리는 상상의 동물. 성질이 바르고 곧아 사람들이 싸우면 잘못한 사람에게만 달려들어 들이받는다. 그러고는 반드시 시비를 가려내는 영물이다. 사납게 찢어진 입, 그 사이로 삐죽이 튀어나온 이빨, 육중한 체구. 조선 정궁의 위엄이 이와 같은 듯하다. 해치를 뒤로하고 광화문으로 들어섰다. 광화문은 경복궁의 남문이자 동시에 정문이다. 사연도 많다. 일제가 1927년에 동문인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고, 6·25 전쟁 때는 포격으로 문루가 불타기도 했다. 1968년 지금의 위치로 복원됐지만 광화문의 불행은 이어지고 있다. 문루의 재료로 철근 콘크리트가 사용되면서 목조 건물의 우아함을 잃었고, 원래의 자리보다 뒤로 밀린데다 일제가 지어놓은 총독부 건물을 기준으로 삼은 탓에 방향도 정남향에서 서쪽으로 틀어졌다. 하지만 얼마 전 광화문의 위치를 바로잡겠다는 문화재청의 발표가 있었다. 언젠가 본래의 모습을 갖추게 될 광화문을 기대해 본다. 가운데 문을 통과하다 무심코 천장을 올려다 보니 봉황 그림이 있다. 가운데 문은 왕만 드나들었다. 문신이 드나들던 오른쪽 문의 천장에는 천마, 무신이 출입하던 왼쪽 문의 천장에는 거북 그림이 있다. 문을 통과할 때도, 길을 걸을 때도 왕은 항상 중심이었다. 광화문부터 외전이 시작된다. 외전은 쉽게 말해 왕이 나랏일을 맡아 보던 공간이다. 큰 행사나 조례가 열리는 정전과 왕의 집무실 격인 편전 그리고 행정을 맡던 담당 기구가 모여 있는 궐내각사로 구성된다. 광화문을 지나니 2001년에 복원한 흥례문이 앞쪽으로 바라다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사라진 모습에 가슴까지 탁 트인다. 양옆으로 행각이 뻗어 있고 그 가운데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2층 목조 건물이 자리를 잡았다. 흥례문을 지나면 왕의 성스러운 영역과 일반인의 세계를 구분하는 금천이 나온다. 지금은 물이 흐르지 않는다. 예전에도 북악산과 궁궐 서쪽에서 물을 끌어들여 흐르게 했던 것이다. 북악산의 정기가 금천을 타고 경복궁까지 전해지도록 말이다. 금천 위에 놓인 영제교는 왕과 백성을 이어주는 역할을 상징한다. 금천 제방 위에는 상상의 동물인 서수(기린 따위의 성스러운 짐승)가 눈을 부릅뜨고 물길을 타고 침입할지도 모를 잡귀를 감시한다. 외전 중에서 궁궐의 상징은 단연 정전. 경복궁의 정전이 바로 근정전이다. 근정전의 웅장함을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포인트는 건물 남쪽의 오른쪽 행각이다. 전면과 측면이 동시에 바라보이고 그 뒤로 녹음을 품은 북악산이 살짝 비껴 있는 게 보인다. 근정전 서쪽으로 보이는 인왕산 자락이 살포시 건물을 감싸안은 듯하다. 끝이 살짝 올라간 근정전의 처마는 마치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새의 날갯짓 같다. 행각의 처마와 기둥이 어울린 모습이 마치 한 폭의 병풍을 보는 듯하다. 정전의 앞마당을 조정이라 한다. 왕은 이곳에서 조회를 하고 궁궐 내부의 모든 업무를 관장했다. 그러다 보니 조정은 정부의 의미로도 통한다. 조정을 가로질러 근정전으로 향했다. 좌우로 늘어선 품계석(벼슬의 등급을 표시한 비석)을 뒤로한 채 오직 왕만 걸을 수 있었다는 가운데 길을 택했다.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등 방위신과 십이지신 그리고 서수가 월대(궁전이나 누각 앞에 세워놓은 섬돌) 난간에서 건물을 호위한다. 근정전은 밖에서 보면 2층 건물이지만 안은 정작 위아래가 트인 구조다. 곧게 뻗은 기둥과 높은 천장이 웅장함을 더한다. 천장의 황룡 두 마리가 실내를 밝히고 정면으로 위엄을 품은 옥좌가 자리를 잡았다. 그 뒤로 하얀 달과 붉은 해 그리고 중국 도교의 전설에 등장하는 가장 높고 성스럽다는 곤륜산이 그려진 ‘일월곤륜도’가 걸렸다. 근정전 뒤쪽에 위치한 사정전은 왕이 일상 업무를 보던 곳이다. 건물의 모습이 근정전의 위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왕과 신하가 천하의 이치를 고민하던 부산스러움이 곳곳에 묻어 있는 듯하다. 발톱이 넷인 쌍룡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그림이 걸려 있는데, 마치 그들의 활기를 머금은 것 같다. 사정전을 벗어나면 경복궁의 내전이 시작된다. ▒ 경복궁 한눈에 보기 궁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왕이 나랏일을 보던 외전과 사적 공간인 내전 그리고 왕과 왕족의 휴식 공간인 후원이 그것이다. [출처 <쏭 내관의 재미있는 궁궐 기행>] ▒ 놓치기 쉬운 근정전 관람 포인트 조정의 쇠고리 조정을 걷다 보면 군데군데 쇠고리가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보통 나라에 큰 행사가 있을 때 근정전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그 앞쪽에 천막을 치는데 쇠고리는 이때 천막을 고정하기 위해 끈을 묶던 곳. 왕의 계단, 답도 근정전으로 올라가는 남쪽 계단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가운데에는 봉황 무늬가 새겨진 널찍한 돌이 놓여 있다. 이 돌이 바로 왕이 지나다니는 답도. 왕은 가마를 타고 답도 위를 지났다고 한다. 권위의 상징인 정, 방화수 역할을 한 드므 근정전 월대 모서리에는 큰 향로 같은 것이 놓여 있다. 하늘의 기운을 담기 위해 세운 정으로 왕의 권위를 상징한다. 또 궁궐의 주요 건물 앞에는 화재에 대비하기 위해 물을 담아두던 드므가 있다. |
[ 내전 ] 고즈넉한 생활 공간, 강녕전·교태전·자경전 궁궐의 내전은 왕과 왕비 그리고 그 가족이 생활하는 사적인 공간이다. 사정전을 지나면서부터 경복궁의 내전이 시작된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의 편안함을 기억하는가. 침전인 강녕전에 들어서는 왕의 기분이 궁금해진다. 너른 마당을 가진 강녕전의 분위기는 편안하다. 월대도 있지만 위압적이기보다는 우아하다. 낮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지붕과 살짝 끝이 올라간 처마가 잘 어우러진 느낌이다. 지붕에는 용마루가 없다. 왕이 용을 상징하므로 용의 침전에 또 다른 용이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왕과 왕비의 침전에선 다음 왕인 세자가 태어난다. 세자 역시 용이다. 용이 용을 누르는 형국이 용납되지 않았던 것이다. 강녕전 뒤로는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이 있다. 왕비의 침전은 보통 궁궐의 가장 중심에 위치한다. 그래서 중궁전이라 불렸고, 아홉 개의 문을 통과해야 닿을 수 있었기에 ‘구중궁궐’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강녕전과 마찬가지로 지붕에는 용마루가 없고 첫인상도 차분하다. 그런 와중에도 궁궐의 살림과 궐내 여성의 일거수 일투족을 책임졌을 왕비의 다부진 면모가 연상되기도 한다. 교태전의 볼거리는 역시 뒤뜰에 있는 아미산이다. 경회루 연못을 만들 때 퍼낸 흙으로 층을 쌓아 만들었다. 목조 건축물을 본떠서 벽돌을 쌓아 육각형으로 만든 아미산 굴뚝은 또 다른 볼거리다. 각각의 무늬와 그림을 하나씩 따로 구워 끼워 맞춘 솜씨가 놀라울 따름이다. 흥선대원군이 어머니를 위해 지었다는 자경전은 예스러운 멋이 으뜸이다. 나뭇결과 덧칠을 하지 않은 건물의 빛깔에선 세월의 흐름이 한껏 느껴진다. 널찍한 마당을 두고 침실인 복안당과 다락집 형태의 청연루가 자리한 모습이 아늑하면서도 기품이 있다. 자경전 뒤쪽에는 아름다운 굴뚝이 있다. 아미산 굴뚝처럼 무늬 하나하나를 구워 퍼즐을 맞추듯 이어간 십장생과 길상무늬가 인상 깊다. ▒건물의 용도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건물 이름은 전, 당, 합, 각, 재, 헌, 누, 정 순서로 정리된다. 전은 가장 격이 높고 규모가 크고 중요한 건물이다. 당은 전보다 격이 약간 낮고 사적인 공간으로 많이 사용된다. 합이나 각은 대체로 전, 당의 부속 건물이고 재와 헌은 생활 공간이나 독서를 하는 사색 공간으로 쓰인다. 누는 사람이 지날 수 있을 정도의 높이에 마루를 만든 것인데 공적인 기능과 휴식 공간으로 이용되고, 정은 정자의 개념으로 대부분 휴식을 위한 공간이다. ▒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건물 터를 닦고 건물을 받치는 기단, 그 위에 마치 무대와 같은 월대(중요한 건물에만 존재)가 있다. 기둥과 기둥 사이를 ‘칸’이라고 하는데 이는 건물의 규모를 측정하는 단위가 된다. 서까래는 지붕의 기와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작은 나무들을 걸치는 것이고, 용마루는 앞과 뒤의 지붕이 만나는 부분에 기와를 쌓은 것이다. 용마루 양끝에는 조각상이 일렬로 자리하는데 이것을 잡상이라 한다. 중요한 건물일수록 잡상의 수가 많다. 건물 가운데 건물 이름을 적어 둔 것이 편액이다. ▒궁궐에 원, 사각형, 팔각형이 많은 이유는? 원은 하늘, 사각형은 땅, 팔각형은 사람을 상징한다. 세 도형이 뒤섞인 모습은 곧 천(天)·지(地)·인(人)이 어우러진 형상을 상징한다. |
[ 후원 ] 휴식이 있는 곳, 경회루·향원지 평생을 궁에서 생활해야 하는 왕과 왕족을 위한 휴식 공간이 바로 후원이다. 1만원권 지폐 뒷면에도 등장하는 경회루는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연회를 열던, 공적인 성격을 띠는 후원의 누각이다. 수양버들 사이로 보이는, 잔잔한 연못 가운데에 육중하게 선 누각의 모습이 장관이다. 우리나라 궁궐 누각 중에서 가장 큰 규모라는 것이 실감 난다. 보는 각도에 따라 그 멋도 각양각색이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웅장하고, 측면에서 보면 기품이 있다. 경회루 연못에 배를 띄우고 짙은 녹음에 둘러싸여 시원한 바람을 맞노라면 왕은 심신을 괴롭히던 시름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을 듯싶다. 원래 경회루 사방에는 담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 그 복원 공사가 한창이다. 하지만 담으로 둘러싸인 경회루의 모습이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연못 앞의 수정전(세종대왕 때 집현전으로 사용된 건물) 뒤쪽 계단에 앉아 경회루를 바라볼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나 보다. 교태전을 지나 북쪽으로 올라가면 향원지가 나온다. 경복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꼽힌다. 경회루가 공식 연회가 열리던 곳이라면, 이곳은 오직 왕의 가족만을 위한 공간이다. 연못의 크기도 작고 아담하고, 분위기도 경회루보다 서정적이다. 그 한가운데에 나무가 우거진 ‘섬’이 자리하고, 나무들 가운데로 향기가 멀리 퍼져나간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향원정이 부끄러운 듯 살포시 고개를 내밀고 있다. 단아하게 가로 놓인 취향교가 향원정과 육지를 연결한다. 취향교는 현재 교태전 쪽과 연결돼 있지만 원래는 반대편인 북쪽으로 연결돼 있었다고 한다. 향원지 북쪽으로는 고종 황제가 세웠던 건청궁 복원 공사가 한창이다. 부산스러움이 고즈넉한 향원정의 분위기와 맞지 않아 아쉽다. ▒청와대 자리도 경복궁 후원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 밖도 후원 지역이었다. 왕이 쉴 수 있는 융문당과 유무당이라는 건물과 정자가 있었고 군사를 직접 지휘할 수 있는 경무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내농포 등이 있었다. 일제가 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경복궁 후원을 관저로 지었고, 이것이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의 관저인 경무대로 사용됐다. 이후 지금의 청와대가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이다. ▒명당수 진원지 향원지 북서쪽에 열상진원지라는 곳이 있다. 이름만으로는 무엇인지 가늠하기 쉽지 않은 이곳은 바로 경복궁 명당수의 발원지다. 땅 속의 찬물이 원형 모양의 돌확(돌을 오목하게 파서 만든 홈)을 통해 그 방향이 바뀌면서 물결이 한결 부드러워진다. 그 물이 향원지로 모인다. 옛날에는 흥례문 앞 영제교를 거쳐 청계천까지 흘러나갔다고 한다. ▒경복궁 수문장 교대 의식 경복궁 흥례문 앞 광장에서는 매일 오전 10시, 오후 1시, 오후 3시에 수문장 교대 의식이 열린다. 조선 전기(15세기)에 수문장제도가 완비되던 예종∼중종 때를 배경으로 국가의 상징인 왕실과 궁성을 호위하던 수문군의 근무 형식을 의식으로 재현했다. 관람객은 현장에서 수문장 복식 착용, 사진 촬영, 궁궐 그림 탁본하기 등의 행사에 참여할 수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