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얘기

성공한 사람들의 10가지 비결

봄이나라 2008. 3. 5. 19:42

성공한 사람들의 10가지 비결

 

 

 

인생역전! 한판승

    ① ‘이거다’ 싶으면 과감히 덤벼라  

    ② 사람들과 ‘인간적’ 관계를 유지하라

    ③ 최소 1년 이상 철저히 준비하라

    ④ 직원들에게 먼저 모범을 보여라

    ⑤ 하고 싶은 일, 잘 하는 일을 택하라

    ⑥ ‘인생 전체’를 놓고 철저히 계획하라

    ⑦ ‘창업’만이 유일한 길은 아니다

    ⑧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라

    ⑨ 인맥이 없으면 적극적으로 만들라

    ⑩ 당연한 말 한 가지… 최선을 다하라

 

어느 날 갑자기 내게 명퇴가 닥친다면? 부득이하게 현재의 직장과 직업을 그만두어야 한다면?명퇴와 감원이 새삼 직장인들의 최대 화두로 등장했다. 경기침체로 인해 IMF에 버금가는 감원 태풍이 몰아치면서 직장인들의 마음을 꽁꽁 얼어붙게 만들고 있다. 이 때문에 앞으로 뭘 해서 먹고 살아야 하나, 제2의 인생은 어떻게 개척해야 하나 등에 대한 상념들이 불안감과 함께 많은 직장인들의 뇌리를 사로잡고 있다.

현 직장과의 이별은 샐러리맨의 숙명이다. 그것이 명퇴든 정년퇴직이든 단지 시기의 문제일 뿐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즘은 30대까지 명퇴 대상이 되고 있으며 정년퇴직을 해도 제2의 인생을 준비해야 할 만큼 평균수명이 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사는 ‘인생역전’의 방법은 없을까.

이에 준비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선배들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먼저 매를 맞은 직장인, 먼저 거센 풍파를 헤치고 인생역전에 성공한 사람들로부터 교훈을 얻는 것이다. 이들은 굳이 로또복권이 아니더라도 인생역전이 실현가능한 일임을 웅변하고 있다. 회사원, 대기업 간부, 공무원, 군인, 은행원, 홍보실장, 이사급 연구원, 자영업자, 의사, 기자 등에서 인생역전에 성공, 새 인생을 살고 있는 10인을 만났다. 이들은 “본인의 노력과 대비 여하에 따라 인생역전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노하우가 있다”고 말한다.

 

 

“매출 목표 200억원” 기업 대표된 샐러리맨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서 골프용품 유통업체 임팩트매니지먼트㈜를 운영하는 조진현(45) 대표는 6년 전인 1997년 4월까지 SK글로벌의 화학본부 사업팀장이었다. 샐러리맨이었던 그가 불과 6년 만에 골프 연구소까지 갖추고 내년 매출 200억원을 목표로 하는 업체 대표로 변신했다.

1983년 입사, 동기들 중 선두를 달렸던 그가 사표를 내자 회사가 발칵 뒤집어졌다. 사장은 4개월 간 사표를 수리하지 않고 만류했다. “1996년 계열사인 SK인더스트리가 거의 업계 최초로 명퇴를 실시하는 것에 충격받았습니다. 언젠가는 내게도 닥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승진이 빨라 직장생활이 지겹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라 인생행로를 바꾸기로 결심했습니다.”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은 자신이 좋아하는 골프 관련사업. 말레이시아 지사 근무 때 골프에 입문, 핸디 5의 애호가인 그는 이왕이면 전문가로 새출발하기로 결심했다. 40세에 집을 팔아 미국 샌디에이고 SDGA골프대학(골프경영학 전공) 유학길에 오른 것이다. 여기에는 유창한 영어 실력도 한 요인이 됐다.

하지만 생활이 빠듯해 부인은 현지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으며 자신도 한 학기를 쉬며 학비를 마련해야 했다. 새벽 3시까지 열성적으로 공부한 결과 1999년 8월 3.87점(4.0 만점)이라는 최고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거의 빈털터리 수준. 국내에 집 구할 돈이 없어 식구들을 미국에 남겨 놓은 채 단신 귀국, 방송국 골프 해설위원으로 새 인생을 시작했다.

2000년 4월 투자자들과 함께 현 업체를 설립한 그는 “처음에는 이 업계에 인맥이 없어 고전했다. 그러나 골프 지식과 성실성ㆍ친화력 등으로 인맥을 형성, 이제 ‘군단’을 이루었다”고 말했다.

“유학을 마치면 수중의 돈은 거의 다 떨어진다는 계산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골프 지식이 새 출발에 큰 자산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과감히 투자했습니다. 변호사, 공인회계사, 교수 등 같이 공부한 미국인 동창들이 ‘한 직업만으로 평생을 살면 얼마나 지루하겠느냐’며 모두 ‘커리어 체인지(career change)’를 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의사 사표… 매출 400억원 벤처사 대표로

 

직원 110명, 올해 매출액 400억원. 제대혈 관련 생명공학기업 메디포스트 양윤선(39) 대표는 2000년 8월까지 6년 간 삼성서울병원 임상병리과 의사(교수 겸직)였다. 서울대 의대를 수석 졸업한 양 대표가 안정적인 교수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럽고 매우 쉬운 일이었다. 그런 그가 하루 수십 개 업체가 생겼다가 사라지는 벤처기업 대표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쉽게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이 싫었습니다. 더 나아가 내가 해 보고 싶은 일에 전념해서 더 의욕적으로 일하고 싶었습니다. 대학병원 시스템에서는 내 일을 하는 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양 대표의 창업에는 10년 이상 병원에서 쌓았던 경험들이 기반이 됐다. 그러나 직업 속성상 교수가 벤처사업가로 변신했다는 점은 큰 변화다. 특히 그는 수많은 벤처기업, 바이오업체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는 와중에 회사를 10배 이상으로 성장시켰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지금은 항상 아슬아슬한 전쟁터에 놓여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는 양 대표는 “평소 비즈니스에 흥미가 많았기 때문에 재미있게 일한다. 힘들 때에도 포기하지 않고 낙천적으로 일한 것이 오늘에 이른 큰 요인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양 대표는 초창기 시설투자비가 많이 들어가 자본금을 소진할 때까지 수익모델을 만들어내지 못해 고전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새 사업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에 대해 “기술이 중심이 되는 벤처기업의 경우 구체적 수익모델이 완성됐을 때 창업하라”고 조언한다.

그는 난관을 특유의 친화력으로 돌파했다고 한다. “업무상 만나는 사람들과 사업적 이해관계를 떠나 인간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내게 도움을 준 사람들에 대해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회가 되면 나도 돕겠다는 자세로 임해 왔습니다. 이같은 인간관계가 새로운 분야, 새 형태의 사업을 이해시키고 협조를 구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기자에서 한의사로 극적 ‘대변신’

 

서울 강남구 대치동 황앤리한의원 황치혁(40) 원장은 신문기자 생활을 하다 각고의 노력 끝에 한의사로 인생의 방향을 바꿨다. 그러나 신문기자와 한의사 사이에는 약 10년에 걸친 시간적 공백이 있다.

서울대 외교학과 82학번인 황 원장은 1992년 하반기까지 약 4년 간 한국일보 기자로 근무했다. 힘들다는 ‘언론고시’를 통과해 경제부 체육부 등에서 열심히 그리고 재미있게 일하던 그에게 인생역전의 계기가 찾아온 것은 1992년 3월쯤. 갑자기 심장부위 통증과 함께 체력이 급격히 저하되는 일을 겪었다.

대학병원의 종합진찰 결과 “아무 문제가 없다”는 진단이 나왔지만 선친이 심장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그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또 항상 피로에 절어 힘들어 하는 선배들의 모습도 그의 마음을 어둡게 했다. ‘10~20년 뒤 나도 저렇게 힘들어 하면서 살아야 하나….’

그는 수개월 고민하고 가족, 선배, 친지들과 상의한 끝에 한의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자신의 건강문제에 대한 우려도 한 요인이 됐다. “처자의 생계를 책임진 상태에서 한의대 입시 준비를 해야 하는 형편이라 우선 물려받은 39평 아파트를 팔아 22평짜리 전세로 옮겼습니다. 이후 학원과 독서실을 오가는 생활을 했습니다.”

생계를 위해 도중에 자영업을 하기도 했던 그는 두 번째 도전에서 경희대 한의대 97학번으로 입학했다. “6년 간 재학 중 줄곧 과외를 했음에도 매달 100만~200만원씩 까먹어 물려받은 아파트를 완전히 날렸습니다. 그러나 돈보다는 졸업 후 어떤 한의사가 될 것인가에 대해 더 고민했습니다.”

올 4월 개원한 황 원장은 두 번에 걸친 입시와 오랜 과외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 수험생 전문 클리닉으로 특화,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는 이미 4권의 수험생 관련 서적을 출간하기도 했다. 건강문제 때문이었지만 퇴사할 때 ‘도태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는 그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할 때에는 최소 1년 이상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패밀리 레스토랑 대표된 회사원

 

샐러드 전문 패밀리 레스토랑 운영자 세븐스프링 한준(39)씨는 1997년 IMF 여파로 7년 간 일했던 직장을 떠나야 했다. 이랜드 식품사업부에서 근무하던 한씨는 자신이 하던 일과 같은 업종을 선택해 새 출발을 시도했다.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퇴직 후 3년 간 피자 프렌차이즈 사업을 구상하기도 했지만 피자 가게가 워낙 많아 경쟁이 버거워 포기하기도 했다. 세븐스프링 1호점이 강남에 문을 연 것은 2002년 3월 18일. 투자자를 모집하고 신용대출을 받아 힘들게 돈을 모아 사업을 시작했다. 약 1년 5개월이 지난 올 8월 25일 여의도에 2호점을 열었다. 현재 세븐스프링 하루 매출액은 약 1500만원 정도. 그는 “이제 시작”이라고 말했다.

“세븐스프링의 경쟁력은 헬프서비스입니다.” 보통 패스트푸드점은 고객이 직접 가져다 먹는 셀프서비스, 호텔 고급 레스토랑은 종업원이 모든 시중을 드는 풀 서비스 혹은 테이블 서비스를 실시한다. “기본적으로 셀프서비스 시스템으로 매장을 운영하지만 손님이 원한다면 풀서비스를 제공합니다. 또 샐러드를 맛있게 먹는 법을 아는 분이 적기 때문에 종업원들이 고객 옆에 붙어서 어드바이스를 합니다. ‘이 야채에는 이 소스를 뿌리면 좋다’ 이런 식 입니다.” 헬프서비스란 단어는 세븐스프링에서 직접 만든 단어다. “헬프서비스는 토론 끝에 나온 아이디어입니다. 남과 다른 우리만의 장점 없이 경쟁에서 이길 수는 없습니다.”

“다 때려치우고 음식점이나 하겠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는 외식산업이 3D업종이라고 말했다. “손님 중에는 별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상대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내가 사장이니까 시키면 된다고 생각하면 망합니다. 종업원들은 사장이 하는대로 합니다. 직접 설거지를 하고 화장실도 치워야 합니다.”

 

 

공무원 진급 앞두고 사표… 등반업체 차려

 

아시아트랙킹닷컴(www.asiantrekkingnews.com) 이상배(49) 대표는 1994년 14년 공무원 생활을 접었다. 당시 그의 직책은 경남 양산 시청 주사보 계장 진급을 앞둔 시점이었다. 그가 공무원을 그만둔 이유는 산, 그것도 8000m 이상의 높은 산에 오르고 싶어서다.

“1990년부터 해외에 나가 높은 산에 도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공무원이 일주일 이상 휴가를 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해외 고산 등반은 보름 이하로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는 결국 대한민국에서 가장 안정된 직장을 버렸다.

처음 시작한 일은 건설 하청업. 작은 회사라도 사장은 원하면 산으로 떠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감을 준 업체에서 사장이 장기 해외 여행을 나간다는 것을 좋게 보지 않더군요.” 사장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그리고 아예 산에 대한 모든 것을 다루는 회사를 만들었다. 아시아트랙킹닷컴은 등반 장비 판매, 등반 가이드, 패러글라이딩 장비 판매 및 교육 사업을 한다. 예를 들어 경험이 없는 등산 동호인을 고산 적응 훈련을 시켜 히말라야, 남미 최고봉 아콩카과 등에 올라가도록 도와 준다.

“8000m 이상 산에 오른 것이 6회입니다. 내 인생관은 하고 싶은 일을 하자는 것입니다. 후회는 절대 하지 않습니다. 수입이요? 공무원 때보다는 2배 정도 많습니다.”

물론 안정적인 생활을 외면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공무원하다 나오니까 사회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공직사회에 있으면 자기 업무만 하면 끝입니다. 아무래도 공직에 있으면 권위주의적 마음이 생깁니다. 남들이 와서 굽신거리니까요. 그러나 반대로 사업은 내가 허리를 숙이지 않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씨는 힘들 때마다 목숨을 건 등반을 할 때를 생각한다. “더 힘든 일은 없습니다. 약한 마음이 사라지지요.”

그는 내년 8월 50세 때 세계에서 6번째로 높은 8201m 초오유 정상에서 패러글라이더를 타고 내려올 계획이다. “등반의 진수를 맞보려면 3000m 이상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주 5일 근무로 레저의 시대가 열립니다. 앞날은 희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성공비결은 하고 싶은 일, 잘하는 일을 선택해 밀어붙였다는 것이다. 고교시절부터 산악반 활동을 해 온 이씨는 산사람들 사이에서 상당히 알려진 인물이다. “일 자체를 즐기기 때문에 항상 정열적으로 일할 수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은행원서 변호사로 ‘업 그레이드’

 

인천에서 개업하고 있는 남궁평(39) 변호사는 1983년 서울여상을 졸업했다. 이후 주택은행에 취업, 10년 간 평범한 은행원 생활을 했다. 그러나 1992년 동기들보다 5살 많은 ‘언니’로 성균관대 법대에 입학, 1996년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1999년 사법연수원 수료 이후에는 기업법무를 담당하다 2002년 11월 인천 지방법원 인근에 개인변호사 사무실을 차리고 가정문제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남궁 변호사가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진학을 포기한 것은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이었다. 1남 3녀 중 둘째딸. 그러나 남궁씨는 “아쉬운 건 사실이었지만 그 때는 다 그랬다”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나 단순한 일을 반복해야 하는 은행원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또 화려한 집안 배경이 없는 상황에서 노력으로만 성공할 수 있는 일을 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목표가 사법시험.

직장을 그만두고 학력고사를 치르고 25살에 성균관대 법대에 입학해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대학 등록금은 4년 내내 받은 장학금으로 해결했지만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일은 대학 입학처럼 순조롭지 않았다. 남궁씨는 “경제적인 것도 문제였지만 평소 약골 소리를 듣던 몸으로 고시 공부를 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1994년 1차 시험 합격 후 이듬해 응시한 2차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가 가장 큰 위기였다. 하지만 남궁씨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고시에 도전해 1996년 38회 사법시험에 동차(한 해에 1·2차 시험을 동시에 합격하는 것)로 합격했다.

남궁씨는 늦게 공부를 시작하면서도 조급하게 결과에 매달리지 않고 자신의 상황에 맞는 공부 스타일을 찾은 것을 성공의 비결로 꼽았다. 남궁씨는 또 고시 합격을 통해 인생역전을 꿈꾸는 직장인들에게 “고시는 원래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자기 인생의 계획을 철저하게 세워서 도전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최연소 이사에서 컨설팅회사 대표로

 

한스컨설팅 한근태(47) 대표는 졸업 후 연구원 생활을 하다 국비장학생으로 미국 애크론대에 유학을 떠나 박사학위(고분자공학 전공)를 받았다. 이후 1989년 대우자동차에 차장으로 입사해 39살에 최연소 이사가 됐다.

직장 내에서 초고속 승진을 하던 한씨가 대기업 이사 자리를 박차고 나온 이유는 ‘샐러리맨의 한계’를 절감했기 때문이다. 한씨가 대우자동차 이사로 재직했던 1997년, 회사 임원들이 미국으로 최고경영자 과정 연수를 떠났다가 연수가 끝날 무렵 골프를 친 것이 사내에서 물의를 빚었다. 임원들이 연수 중 골프를 쳤다는 사실이 김우중 회장 귀에 들어가 전원 인사조치가 내려졌던 것. 한씨는 “그 사건을 보니까 ‘대기업 이사도 어쩔 수 없는 월급쟁이’라는 생각이 들어 내 회사를 창업해야 겠다는 결심을 굳혔다”고 말했다.

이후 한씨는 대기업 이사를 지내며 익힌 경영마인드를 바탕으로 경영컨설팅 회사를 창업하기로 결심했다. 한씨의 시작은 불안했다. 일을 배워 보겠노라고 컨설팅 회사에 들어갔지만 경험이 부족했던 한씨의 한 달 월급은 고작 60여만원. 한씨는 월급통장을 보고는 ‘괜히 홧김에 대기업 이사 자리를 관둔 것은 아닌지’ ‘아내와 아이들을 제대로 먹여 살릴 수 있을지’도 고민했다.

그러나 한씨는 2년 간 묵묵히 미래를 위한 투자를 했다. 그리고 1999년 핀란드 헬싱키대학에서 경영학 석사를 취득하고 2002년까지 한국리더십센터 소장으로 근무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상승시켜 나갔다. 그리고 2002년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한스컨설팅’을 창업했다. 한씨는 “창업 1년 후 매출액은 10억원에서 조금 부족한 정도인데 이 정도면 순조로운 출발”이라고 평가했다. 한스컨설팅은 대기업을 상대로 리더십 강좌와 조직내부 문제 해결 등을 전문으로 하고 있다. 한씨는 컨설팅뿐 아니라 한경비즈니스의 고정 칼럼니스트를 비롯해 각종 매체에서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한씨는 “창업 후 내 능력을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위해 투자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며 “이전에 몸 담고 있던 회사에서 인맥과 노하우를 최대한 쌓은 것이 이 바닥에서 살아 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소개했다. 한씨는 또 “반드시 창업을 해야 성공한다는 생각은 금물”이라며 “직장 내에서도 충분히 자신이 생각하는 성공을 달성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호텔 홍보실장 그만두고 교수로

 

수원대학교 호텔경영학과 우경진(39) 교수는 1991년 대우그룹에 입사, 힐튼호텔 홍보실장으로 근무했다. 근무환경도 급여도 괜찮은 직장이었지만 1996년 9살 터울의 둘째 아이를 갖게 되면서 회사를 그만뒀다. 평소 체력이 좋지 않았던 우씨에게 육아와 직장을 병행한다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이다. 우씨는 아이를 놓고 1년 간은 육아에 매달리다 1998년 다시 교수로 화려한 컴백을 했다.

우씨는 출산과 함께 직장에서 밀려나야만 하는 한국 사회의 현실을 보기 좋게 깨뜨린 경우다. 우씨는 호텔에서 근무하면서 경희대로 야간 강의에 출강하면서 교수직에 관심을 갖게 됐다. 우씨는 “내가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을지에 대해 반신반의 했는데, 막상 강의를 나가 보니 가르치는 일이 즐거웠고 학생들의 호응이 의외로 좋은 것을 보고 교수라는 직업을 꿈꾸게 됐다”고 말했다.

출산 이후 우씨는 다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아이 둘을 둔 아줌마가 다시 직장을 갖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게다가 이전 회사로 다시 복귀는 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인생에 변화를 주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그러던 중 몇몇 대학에서 호텔경영학과 교수를 모집한다는 말을 듣고 지원해 1998년 단박에 교수로 임용됐다. 호텔에서 쌓은 실무경험이 좋은 평가를 받았고 몸에 배어 있는 호텔리어의 매너가 면접장에서 통했기 때문이다.

초임 대학 교수의 연봉은 호텔 홍보실장 연봉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나 우씨는 “돈도 중요하지만 현장에서 익힌 경험과 이론을 접목할 수 있어 진정한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게 교수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우씨가 말하는 성공 비결은 ‘변화에 대한 확신’. 우씨는 “인생의 진로를 변경할 때마다 꼭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변경했을 때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도전한다면 성공 가능성은 높아지게 마련”이라고 강조했다.

 

 

장교에서 수억원 연봉 보험사 지점장으로

 

매트라이프 생명보험 서울 삼성동 스타지점장 김성환(32)씨는 이 회사의 스타 가운데 하나다. 입사 이후 영업사원 시절 실적 경쟁에서 늘 전국 1~2등을 다투었다. 그는 입사 전 1999년까지 군인이었다. 중대장인 대위로 군생활을 마치고 회사에 들어갔다. 다른 회사를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보험 영업이 적성에 맞다고 생각했다.

현재 200명 직원을 거느린 김 지점장은 “한창 영업 일선에서 뛸 때 연봉이 수억원이었다”고 말했다. 김 지점장은 자신이 얼마나 받았는가를 밝히기를 꺼린다. 그러나 대충 짐작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회사 관계자는 “현재 영업 직원 가운데 가장 많은 연봉을 받는 사람은 7억원 정도를 번다”고 말했다.

“군을 나서기로 작정을 하고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신문 경제면에서 증권, 부동산 관련 기사를 주의 깊게 읽었습니다.” 그는 입사 5개월 후 제주도로 내려갔다.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 똑같이 일하면 다른 영업사원들에게 뒤지더군요. 10명에게 상품을 판 돈이 남이 한두 명에게 판 것과 같았습니다.” 제주도를 찾은 이유는 서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서 한 번 부딪쳐 보기로 마음먹었다. 부유한 전문직 종사자인 의사들을 겨냥했다. 무조건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가 의사들에게 보험 가입을 권했다. 그렇게 북으로 북으로 진격했다. 마지막 도착지는 인천. 기간이 1년이나 걸렸다. 확보한 의사 고객이 200명에 달했다.

“의사 200명을 고객으로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힘이 들었지만 점차 내공이 쌓이더군요. 요령이 생겨 미리 편지를 보내게 되고, 편지 안에 복권을 넣게 되고….” 그는 “의사를 만날 때 진료권을 끊고 들어갔다”고 한다. “시간이 돈인 사람들입니다. 그 정도는 예의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의사들 사이에 전국을 도는 보험 영업직원이 있다는 소문이 났다. 만 2년 영업을 하는 동안 434명의 고객을 확보했다.

그는 또 지금 영업 사원에서 관리자로 변신에 성공했다. 삼성동 스타지점이 문을 연 것은 지난 10월 1일. 김 지점장은 20여명 사원을 거느리는 본격적인 관리자로 막 첫발을 디딘 것이다. 그의 성공비결은 적극성이다. “외국 보험사들은 영업사원들이 무작정 사람을 만나 영업을 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인맥을 이용하라는 것이죠. 그러나 모든 사람이 좋은 인맥을 가지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인맥이 없다면 적극적으로 인맥을 만들면 됩니다.”

 

 

인터넷 농산물점 주인된 자영업자

 

옥션(www.auction.co.kr)에서 보현산골이라는 이름으로 과일즙·고춧가루·참기름 등을 팔고 있는 허문길(39)씨. 그는 대구에서 휴대전화 대리점을 하다가 1997년 IMF 한파에 사업을 접었다. 형이 농사를 짓던 경북 영천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기로 마음을 먹었다. 읍내에서 15㎞ 떨어진 산골짜기다.

“농촌에 돌아와보니 소비자 가격이 산지 가격에 10배에 달하는 물건도 있더군요.” 그는 인터넷으로 소비자에게 직접 물건을 팔 마음을 먹었다. 1999년 인터넷 전자상거래 사이트인 옥션에 고구마 양파 복숭아 등을 올려 놓고 팔기 시작했다. 그러나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택배비는 비싸고, 포장이 부실해 멍이 들고 벌레가 들어가 항의를 받았습니다.”

살아 숨쉬는 농산물을 파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가 생각해낸 해법은 가공이었다. “과일은 과일즙을 만들고, 깨는 참기름으로 만들어 판매했습니다.” 일이 순조롭게 풀리기 시작했다. 시중에 포도 다이어트가 유행하면서 설탕을 넣지 않은 허씨의 ‘순수 과일즙’이 인기를 끌었다. 직접 포도를 재배하고 가공해 시중가격보다 30~40% 저렴하게 물건을 팔았다. “이제는 포장기 6대, 착즙기 20대 분량 돌리고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커졌습니다.” 작년 추석에는 한 달에 4000만원 매출을 올리기도 했다. “그냥 농사만 지었을 때보다 5배 정도는 더 벌고 있습니다.”

옥션에서는 수만 명이 물건을 판다. “그 가운데 잘 파는 사람이 어떻게 하는가를 보고 따라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소비자가 신뢰할 수 있도록 선전문구를 만들고,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주변에서 그를 따라해보겠다는 사람이 많았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모르는 것이 생기면 무조건 저에게 전화를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사이트에 방법이 다 적혀 있는데 보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사이트를 샅샅이 뒤져 잘하는 사람을 벤치마킹해야 한다”며 “사이트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며 판매방법을 연구하는가가 승부”라고 말했다.

성공과 실패를 가른 것은 적극성이다. “대구에 있는 대학까지 하루 3시간씩 오가며 인터넷과 컴퓨터에 대해 배웠습니다. 술, 담배도 이때 끊었습니다. 너무 재미있어서 공부하다가 밤을 새운 적도 많습니다.” 남에게 의지하는 사람과 몸으로 부딪쳐 배우는 사람의 차이가 성공과 실패로 나타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