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객>의 펜을 잠시 놓은 허영만이 그의 친구인 산악인 박영석, 허정 PD와 함께 캠퍼밴을 타고 희고 긴 구름의 땅 구석구석을 누볐다. 정해진 일정 없이 마음이 닿는 곳에서 낮에는 트레킹을 하고 낚싯대를 드리웠고, 밤이면 달빛을 술잔에 담아 마시고 별을 맞으며 잠들었다. 낭만적이면서도 코믹 만발이었던 ‘식객’ 여행팀의 캐러밴은 고요한 뉴질랜드를 이렇게 잠시 흔들어놓았다.
거대한 구름 덩어리 사이로 내비치는 햇살, 그리고 그 빛을 반사해 거울처럼 맑은 빛을 드러내는 빙하호수, 멀리 머리에 눈을 쌓아둔 설산…. ‘100퍼센트 자연’이라는 꼬리표를 단 세계에서 제일가는 청정 국가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풍경이다. 그러나 희고 긴 구름을 두 덩어리로 알맞게 나누어놓은 듯한 뉴질랜드의 멋진 풍광 속에는 우리가 놓쳤던 하얀 보석이 하나 숨어 있다. 애써 찾아내려 해도 도대체 절경이 아닌 곳을 찾기 어려운 숲과 초원의 나무 그늘 아래 어김없이 한 대씩은 세워져 있는 하얀색 캠퍼밴 Campervan. 뉴질랜드의 하얗고 복슬복슬한 양만큼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자유’라는 이름을 실은 캠퍼밴이다. 길이 있는 곳에서 길이 없는 곳까지 뉴질랜드라는 자연의 진수성찬을 모두 맛볼 수 있는 이번 캠퍼밴 여행의 동반자들은 실로 화려했다.
로터루아 와이망구 화산 지대의 요오드 함량이 높은 온천. 멀리 보이는 산은 1880년대에 대폭발을 일으켰던 타라웨라 산이다.
이른바 ‘식객’들의 모임. 원래 ‘식객’이라 함은 남의 집에 얹혀살며 하는 일 없이 얻어먹는 사람을 말하지만, 예로부터 식객이라 불리는 사람들 중에는 지루한 세상에 유쾌한 일탈의 즐거움을 준 위인이 많았다고 한다. 만화 <식객>의 주인공처럼 보기 드문 미각으로 좌중을 평정한 사람을 ‘식객’이라고 칭한다면, 이번 여행의 구성원은 자타가 공인하는 맛의 협객들이다. 이미 천하제일의 맛을 찾기 위해 팔도강산을 누빈 <식객>의 주인공 ‘성찬’을 만들어낸 허영만 화백. 맛의 고장 여수 출신에 이 작품을 위해 2년간 취재를 하고 라면 박스 세 상자 분량의 음식 사진들을 찍어왔으니 탄탄하고 현란한 미각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리고 허영만 화백을 산으로 이끈 인물이자 세계적인 산악인 박영석 대장. 역시 산과 와인에 중독된 뛰어난 미각의 소유자다. 다음은 이번 여행을 제안하고 선동한 뉴질랜드의 캠퍼밴 여행 기획자 김태훈. 오랫동안 여행을 해온 탓에 음식 기행도 혀를 내두를 만하다. 그리고 허 화백의 오랜 친구인 김봉주 사장. 거기에 <도전! 지구 탐험대> 제작을 위해 10년 넘게 세계 구석구석을 누비느라 혀가 짧아질 겨를이 없었던 나는 예민한 미각 때문이 아니라 그냥 너무 많이 잘 먹는다는 이유만으로 ‘식객’ 여행팀의 막내가 되었다. 살가운 입담과 화려한 미각의 이력을 가진 식객들과 함께 한 달간 뉴질랜드를 누빌 생각을 하니 캠퍼밴의 시동을 걸기 전부터 가슴의 엔진이 먼저 발동을 걸기 시작한다. 정해진 코스 없이, 목적지 없이 ‘멋대로 루트’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여행 계획이었다.
자유를 실은 차, 캠퍼밴
우리는 콘도처럼 여행에 필요한 모든 편의 시설을 차량에 갖춘 6인용 캠퍼밴을 낙점했다. ‘식객’들의 여행답게 한국식 식기도 따로 준비하고, 캠퍼밴 냉장고에 요리를 위한 야채를 잔뜩 넣고 요트의 도시 오클랜드에서 북섬 상단을 향해 출발했다. 캠퍼밴이 처음 도착한 곳은 바다낚시의 천국, 베이 오브 아일랜드 Bay of Islands. 남태평양의 거친 파도가 복잡한 해안선과 후미를 만든 이곳은 자연의 가혹함조차 은혜로움이 되는 축복받은 뉴질랜드 땅의 운명을 증명해 준다.
복잡한 해안선과 버려진 섬들은 그야말로 강태공들의 천국이다. 어디서든 낚싯대를 드리울 수 있고, 미끼가 부실해도 지천에 널린 장어가 낚시꾼들의 굶주린 손맛을 충족시켜 준다. 게다가 조금 떨어진 바다로 나가면 한국에서는 쉽게 먹을 수 없는 자연산 활어를 잡자마자 맛볼 수 있으니 낚시를 좋아하는 허 화백과 박 대장은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들이 되었다. 숙련된 스킨스쿠버 다이빙 실력으로 굵직한 바닷가재를 잡아 올린 박 대장의 작품이 여행의 첫 식사였다. 바다와 강을 오가며 아이처럼 신이 나 낚시를 즐기던 두 강태공을 김태훈이 겨우 설득해 다시 길을 나섰다.
바다를 떠나 우리가 닿은 곳은 뉴질랜드 북섬의 끝, 케이프레인가 Cape Reinga. 푸른 바다와 빨간 등대의 모습이 한 장의 그림엽서 같지만 조금만 벗어나면 황량한 사막이 끝없이 이어지는 경이로운 곳이다. 멀리서 보면 눈처럼 하얀 모래가 펼쳐진 우아한 풍경이지만 트레킹을 작정하고 길을 나서면 황량하기 그지없는 ‘사막’이다. 캠퍼밴을 타고 떠나는 여행길에서 만난 뉴질랜드의 다양한 모습은 사계절과 세계의 다양한 자연 현상을 모두 모아놓은 종합 선물 세트와도 같았다. 아름다운 자연을 그대로 지키면서 인간도 즐거울 수 있는 곳, 그래서 레포츠가 발달한 곳이 뉴질랜드다. 남태평양의 바누아투 원주민들이 번지 점프를 가장 먼저 시작했다면, 세계 최초의 상업 번지 점프가 시작된 곳이 바로 타우포 Taupo다. 아무리 등산을 즐기는 체력가 허 화백이라지만 47미터 아래로 질주하듯 추락하는 아찔한 스포츠를 좋아할까 걱정했으나 번지 점프를 마친 허 화백은 아무 말도 않고 담대하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릴 뿐이었다.
‘브라보!’
북섬 일주를 마치고 북섬의 최남단이자 뉴질랜드의 수도인 웰링턴에서 페리를 타고 남섬으로 넘어가자 본격적인 트레킹이 시작되었다. 뉴질랜드를 처음 발견한 네덜란드 선장 아벨 타스만의 이름을 붙인 국립공원. 이미 자유로운 여행가들을 태운 캠퍼밴 수십 대가 주차되어 있는 국립공원 입구에서 허가증을 받고, 길을 나섰다. 트레킹은 정상을 목표로 오르는 ‘등반’과는 다르게 주변의 경치와 자연을 체험하는 자신만의 여유와 만족을 위한 산행이라 할 수 있다.
최근 박영석 대장과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 등반을 마친 허영만 화백은 오랜만에 치열한 등반이 아닌 게으른 산행의 기쁨을 누렸다. 트레킹과 가뿐한 번지 점프 후 허 화백이 도전한 종목은 카약. 허 화백은 오랜 친구인 김봉주 사장과 한 팀이 됐으나, 그들의 우정과는 상관없이 카약은 두 사람의 의견 차이로 앞으로 나아갈 줄 몰랐다. ‘그냥 천천히 물 따라 가자’는 김봉주 사장과 ‘속도를 내면서 스릴을 즐기자’는 허 화백. 겉으로 보기에는 간단한 노 젓기였지만 허 화백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골에서 삽질하는 것보다 더 어렵단다. 카약에 대한 화려한 환상이 깨어진 아쉬운 날이었다.
만만하게 본 카약에 놀라 기죽어 있던 분위기도 잠시, 싱그러운 향기가 코를 찌르고 창가로 유럽에서나 볼 수 있는 포도밭 풍경이 펼쳐지자 식객 일행의 캠퍼밴에 다시 활기가 생겼다. 초기 뉴질랜드는 영국 이민자들이 많아 와인보다는 맥주를 즐겼다고 한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뉴질랜드 와인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뉴질랜드의 와인 붐은 40~50년의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세계 와인 품평회에서 늘 좋은 성적을 올리는 것으로 봐서는 맛과 향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말보로 베이, 넬슨 지역 등 뉴질랜드 와인으로 유명한 곳이 몇 군데 있지만 우리가 찾은 곳은 뉴질랜드 최고의 와이너리인 블렌하임 Blenheim의 몬태나 Montana였다.
북섬보다는 기후와 토양이 포도 재배에 적합한 남섬은 세계적인 와인 붐에서 조금은 소외되어 있지만 알 만한 와인 애호가들은 일부러 찾아오는 곳이기도 하다. 뉴질랜드산 와인의 특징은 마시고 난 뒤 혀끝을 꽉 잡아주는 듯한 묵직함이 일품이다. 특히 동네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와인은 거의 맞춤와인 수준이었다. 와인을 비롯해 세상의 모든 술에 지극한 애정이 있는 허영만 화백이 눈에 빛을 발하며 와인을 감상했다. 아직 우리나라에 수입되지 않는 와인이기에 더욱 탐내는 허 화백. 와이너리 주인이 직접 관리한 ‘가문의 영광’과도 같은 와인 여섯 병을 선물용으로 구입했다. 그러나 뿌듯함으로 만족해하는 그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여행 내내 호시탐탐 와인을 노리는 주당들의 유혹 때문에 허 화백은 그 여섯 병을 지키기 위해 매일 밤 다른 술을 사다 날라야 했기 때문이다.
1. 서양의 재래식 화장실(Long Drop, 오랫동안 떨어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에서 포즈를 취한 허영만. 2.3.‘영국이 아닌곳에서 가장 영국적’이라는 평을 듣는 남섬의 중심 도시 라이스트처치의 대성당과 거리 풍경.
여행의 막바지에 이르자 트레킹이 아쉬웠던 우리는 중부 캔터베리에 속하는 비옥한 땅, 아서스 패스 Arthur's Pass로 향했다. 이곳은 국립공원 내 트레킹 시스템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는 데다 거대한 암벽과 가파른 협곡, 시원한 폭포까지 갖추고 있어 마치 트레킹을 즐기는 사람들을 위해 따로 마련해 놓은 인공 공원 같기도 하다. 하지만 아서스패스는 어디까지나 자연 그대로의 모습일 뿐이다. 아서스패스의 트레킹도 훌륭했지만 뉴질랜드 트레킹의 백미는 웨스트코스트와 밀퍼드사운드라고 할 수 있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우리가 가진 욕심이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 깨닫게 해주는 장엄한 공간, 밀퍼드사운드. 그곳엔 설산, 빙하, 폭포, 계곡과 호수, 온천까지 인간이 볼 수 있는 모든 지형과 자연을 모아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까지 만난 대부분의 트레킹 코스들은 제각각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지만 밀퍼드사운드처럼 서로 다르게, 하지만 조화롭게 여러 지형이 공존하는 곳도 드물 것이다. 우리가 캠퍼밴으로 한 달간 달린 거리는 약 5500킬로미터다. 그 길고 긴 길을 우리는 정말 가고 싶은 만큼만 가고 가다가 멈추고 싶으면 멈췄다.
강이 보이면 차를 세우고 낚싯대를 드리웠고, 아름다운 호수에선 잠시 책을 읽는 여유를 부렸고, 오르고픈 산이 보이면 숨이 턱에 찰 정도로 걷기도 했다. 태어나서 가장 오래 놀아봤다는 허영만 화백. 호숫가에서 캠퍼밴을 세우고 바비큐로 저녁 자리가 펼쳐졌는데 허 화백이 보이지 않았다. 호숫가에 침낭을 덮어쓰고 달빛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종교가 탄생되는 게 아니냐며 농담을 주고받다 문득 그의 그런 운치가 부러울 뿐이었다. 결국 우리 모두는 저녁상을 들고 나와 함께 달빛을 받기로 했다.
그때 우리 머리 위로 순식간에 떨어지는 유성. 이미 새벽이 다가오는 시간이었는데, 너무 큰 유성이 떨어지는 바람에 내심 지구가 멸망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될 정도였다. 갑작스러운 유성 출현에 우리는 소원도 빌지 못하고 다들 입맛만 다셨다. “좋구나… 달빛을 술잔에 담아 한잔하자.” 그날은 내 인생에서 운치의 극치를 맛본 밤이었다.
캠퍼밴 타고 뉴질랜드 일주하는 법
차 안에 숙박 시설을 갖춘 캠퍼밴을 타고 뉴질랜드 일주를 하고 싶다면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우선 북섬인 오클랜드에서 시작해 북섬 맨 꼭대기부터 내려오는 코스로, 남섬까지 돌고 남섬의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차를 반납하는 것. 다른 한 가지는 반대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시작해 남섬을 먼저 돌고 북섬의 오클랜드에서 여행을 마치는 코스인데, 경험상 전자를 추천하고 싶다. 이 두 코스는 적어도 한 달 정도의 일정을 잡아야 제대로 된 캠퍼밴 여행을 만끽할 수 있다.
시간을 많이 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방법은 북섬이나 남섬 중 한 곳을 골라 보름 정도의 일정으로 도는 것이다. 물론 보름만에 남섬과 북섬을 모두 돌 수도 있다. 여행 준비물은 일반 여행보다 훨씬 단출하다. 대부분의 용품이 모두 캠퍼밴 안에 구비되어 있기 때문. 다만 필수품인 국제운전면허증은 꼭 챙겨야 한다. 국내면허증으로는 차량을 빌릴 수도, 운전할 수도 없다. 국내에서 인터넷이나 전화를 통해 미리 예약을 하면 현지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빌릴 수 있고, 장기 렌털일수록 할인율이 높아 경제적이다. 뉴질랜드 캠퍼밴 정보 www.campervan.co.kr, www.campingcar.co.kr 문의 (64)9-459-6548 팩스 (64)9-459-6542 이메일 director@i.net.nz
캠퍼밴의 내부 구조
캠퍼밴은 자그마한 고급 콘도로 생각될 정도로 편안하고 아름다운 내부 구조를 가지고 있다. 특히 편리한 동선 속에 세밀하게 디자인된 시설들은 어린 아기나 노인들과 함께하는 여행도 편안하게 즐길 수 있다. 운행 중의 편안한 수면이나 화장실 사용, 여행사의 스케줄이 아닌 가족의 스케줄과 식성대로 먹을 수 있는 식사 등은 평소의 생체 리듬을 깨지 않아 여행이 끝날 때라도 여독이 쌓이지 않는다. 세면대 외에 변기, 샤워 시설 등이 구비되어 있다. 생활 오수는 차량에 마련되어 있는 하수 탱크에 저장되며, 이 하수 탱크가 가득 차면 지정된 배수장에서 배수하면 된다. 배수장은 각 캠프 사이트 및 홀리데이 파크 Holiday Park, 뉴질랜드 정부에서 만든 곳이 마을마다 있다. 온수 가스용 순간 온수기가 설치되어 있어 어떤 장소에서도 따듯한 물로 샤워 및 설거지, 세수를 할 수 있다.
스위치는 차량 내부 중심 상단부의 펌프 스위치 옆에 있고, 스위치를 켜면 15분 이후부터 뜨거운 물을 사용할 수 있다. 냉장고 일반 전원 및 자동차의 주거용 배터리를 이용해 가동되며 여름철에라도 식품을 신선하게 저장할 수 있도록 24시간 켜놓을 수 있다. 시원한 화이트 와인과 해산물을 보관하기에 좋다. 가스레인지 및 그릴 가정에서처럼 편안하게 음식을 해 먹을 수 있도록 가스레인지 및 그릴이 마련되어 있다. 침대 및 테이블 잠은 여행을 하는 데 아주 중요한 요소다. 캠퍼밴은 2~6명까지 편안히 취침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테이블 주위로 대형 유리가 삼면으로 둘러싸여 있어 최고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며 식사를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