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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메나. 지진으로 파괴되어 물 밑으로 가라앉은 해저도시 아폴로니아가 있는 곳. 하얀 석회벽 사이로 난 계단을 올라가면 맑은 눈동자를 가진 아이들이 여행자를 향해 천진한 웃음을 보여준다. 히잡을 쓴 여인들이 빙긋 웃어 보이며 ‘악마의 눈’(터키 전통 문양의 일종)을 새긴 팔찌를 “원 리라” 하며 내보인다.
시메나에서 보트를 타고 아폴로니아의 흔적을 더듬어보는 일은 묘한 기분이 들게 한다. 물결이 흔들릴 때마다 옛 도시의 흔적이 물 위로 흐릿하게 번진다. 물 속, 죽은 자들의 도시. 성벽 위를 헤엄치는 물고기 떼가 애잔하다. 터키로 떠나오기 전, 한 달 동안 터키를 여행했다는 한 여행가가 말했다.
“시메나에서 이틀만 묵어봐, 꼭! 별이 어떻게 끝없이 둥근 원을 그리며 회전하는지를 알게 될 테니까. 인간의 삶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도 막연하게나마 깨닫게 될지 몰라.”
하지만 취재를 해야 하는 여행기자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끝없이 계속되는 이동과 촬영, 취재지의 지명과 경로 확인 그리고 재확인. 여행의 피로. 인간의 삶이 덧없다는 것을 깨달을 시간이 없다.
케코바에서 나와 카쉬, 칼칸, 파타라를 경유해 마르마리스(Marmaris)의 그랜드 마르마리스 팰리스 호텔에 들어온 시간은 밤 10시. 늦은 저녁식사를 빵 한 조각과 수프로 때운 후 침대에 누웠다. 지금쯤 시메나의 밤하늘에 뜬 별들은 눈이 어지럽도록 회전하고 있을 터다.
터키 일주일간의 기록 ② 마르마리스 & 디딤
마르마리스는 에게 해와 지중해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항구도시다. 고대에는 아나톨리아-로데스-이집트로 연결되는 무역 루트의 주요 도시였으며 세계에서 가장 큰 자연항이기도 했다.
항구에는 수많은 요트와 보트가 정박해 있고 해안에는 예쁜 카페가 몰려 있다. 매년 5월이면 마르마리스 요트쇼가 펼쳐진다.
하루가 막 시작되려 할 때 마르마리스에서 기분 좋은 산책을 즐겼다. 해변 카페에서는 종업원들이 탁자를 하나 둘씩 내놓고 고양이는 나른한 햇살을 받으며 하품을 해 댔다.
신문을 든 노인들이 느린 걸음으로 해변을 산책하고 있다. 이런 데서 커피 한 잔 마시면 좋겠다. 그런데 사다트는 빨리 이동하자고 재촉이다.
마르마리스를 떠나 디딤까지 약 세 시간 동안 내륙 국도를 타고 이동했다. 가는 내내 광활한 언덕이 펼쳐졌다. 올리브나무가 빽빽하다. 터키의 올리브는 정말 맛있다. 절여서도, 삭혀서도, 짜서 기름으로도 먹는다. 자신의 나라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사다트. 이탈리아와 프랑스산 올리브 가공품은 대부분 터키산 올리브를 원료로 만든다고 자랑한다. 하루에 올리브 세 알만 먹으면 변비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다는 ‘친절한’ 설명도 빼놓지 않는다. |
디딤은 고대 유적 도시다. 예로부터 그리스 델포이와 함께 신탁 도시로 유명했다. 그리스의 델포이에 아폴론 신전이 있는데 디딤에도 아폴론 신전이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이곳에서 신탁을 받았다고 한다.
지금은 무너진 돌기둥이 곳곳에 뒹굴고 기둥은 고작 세 개가 남아 있을 뿐이지만 당시의 거대함을 상상하기에는 충분하다. 디딤의 아폴론 신전은 델포이의 그것보다 규모는 작지만 보존 상태가 좋다.
아폴론 신전에서 한 무리의 터키 고등학생들을 만났 다. 이들은 돌덩이가 전하는 역사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하다. 거대한 돌무더기 사이를 뛰어다니며 장난을 치고 디지털 카메라로 온갖 포즈를 취한 채 사진을 찍는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신전에 울려 퍼진다.
어쩌면 아폴론 신전에 아로새겨진 역사와 신화를 한 시간여의 답사로 읽어내기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돌덩이를 가만가만 쓰다듬어 보는 것이 바쁜 여행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다.
저녁 6시경, 이즈미르에 도착했다. 터키 제3의 도시이자 이스탄불에 이어 제2의 항구도시인 이즈미르는 젊은 활력으로 가득 찬 곳이다. 터키인이 ‘아름다운 이즈미르’라 부르는 이 도시는 온갖 선박과 요트로 떠들썩하다. 해안을 따라서 카페촌이 형성되었는데 우리나라 부산 광안리 풍경을 상상하면 되겠다. 멋지게 차려입은 젊은이들이 맥주와 포도주를 마시며 밤늦게까지 파티를 즐긴다. 이즈미르의 상징물인 시계탑 광장도 볼 만하다. |
터키 일주일간의 기록 ③ 에페소스 & 히에라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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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스는 마리아, 사도 요한과 관련된 곳이다. 사도 요한은 마리아와 함께 에페소스로 왔고 성도들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요한은 이곳에 머물며 ‘요한복음’을 썼다. 한때 교회가 번성하기도 했지만 7세기부터는 오스만 제국의 힘이 커져 잦은 침략으로 피폐해졌으며 이후에는 오스만투르크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터키 일정 3일째. 오전에는 에페소스를 여유롭게 돌아볼 수 있었다. 매표소를 지나면 바리우스의 목욕탕과 아고라(집회나 종교 행사 등이 열리던 곳), 오데온(소극장)이 있다.
이 부분을 지나면 에페소스가 본격 펼쳐진다. 현재 남아 있는 에페소스의 유적은 알렉산드로스의 장수였던 리시마쿠스가 기원전 3세기에 세운 도시의 흔적. 당시 25만 명이 거주했으며 ‘아시아 최대의 도시’였다.
에페소스의 번영은 수많은 대리석 기둥과 수레 두 대가 거뜬히 지나갈 수 있는 넓은 길에서 짐작할 수 있다. 헤라클레스의 문을 지나면 넓은 대리석 거리가 펼쳐진다. 이어지는 가이드 사다트의 요란한 장광설.
“이곳은 고급 상점과 주택이 늘어선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목욕탕이 있던 곳으로 파이프로 온수를 공급할 만큼 문명이 발달했습니다. 게다가 창녀촌도 있었는데, 입구에 발바닥 문양이 새겨져 있었죠. 발을 문양에 대본 후 문양보다 발이 작으면 입장할 수 없었습니다. 미성년자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어떻게 한 도시의 역사를 가이드의 몇십 분 설명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차라리 가이드북에 쓰인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한마디가 에페소스의 모든 것을 더 잘 설명해 줄지도 모른다.
‘Panta borei kay aydem meneyi panta reyi.’(항상 변하고, 항상 넘쳐나며, 결코 멈추지 않는 곳.)
에페소스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유적은 켈수스 도서관이다. 서기 135년, 이 지방의 총독이었던 켈수스 폴레마이아누스를 기리기 위해 그의 아들이 지었다. 에페소스의 여러 유적 가운데 전면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높이 16m의 건물에 1만2,000권의 책이 비치돼 있었다고 하니 놀랍기만 하다. 지금의 건물은 고트족에 의해 최초로 무너진 후 여러 차례 재건된 것이다. |
‘사도행전’에는 사도 바울로가 에페소스의 두란노 서원에서 강론을 펼쳤다고 나온다. 사도 바울로의 에페소스 방문 이후 교회가 부흥했고 바로 사도 바울로는 로마의 감옥에 투옥된다.
그는 투옥 중에 에페소스 교회에 편지를 보내는데 이 편지의 모음이 바로 ‘에페소스인들에게 보낸 편지’다. 혹자는 이 켈수스 도서관이 <성경>에 나오는 두란노 서원이 아니냐고 추측하지만, 켈수스 도서관은 사도 바울로가 에페소스를 방문한 시기보다 늦게 완성되어 신빙성이 떨어진다.
에페소스 출구 앞에 있는 원형극장은 ‘거대하다’는 말로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파나이르 산의 경사로에 세워진 이 극장은 무대에서 맨 꼭대기 층까지 높이가 60m에 달한다. 2만4,0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다. 소리가 가장 잘 들리도록 설계했다는 가이드의 말에 너도나도 소리를 질러본다.
버스는 에페소스를 떠나 파무칼레로 향했다. 이제 몸이 미니 버스 좌석에서 졸음을 청할 정도로 좁은 버스에 익숙해졌다. 사다트도 한국 기자들에게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취재지에 도착하면 설명을 듣고는 뿔난 망아지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미친 듯이 사진을 찍는 기자들을 향해 “코리안 파파라치!” 하며 능글맞은 웃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
하지만 어쩌랴. 일정은 촉박하고 지면에 실을 사진은 만들어야 하고…. 여행 기사는 기사가 아무리 좋아도 사진이 엉망이면 말짱 도루묵이다. 파무칼레는 실망이었다. 엽서나 화보집에서 보던 하얀 석회 연못에 초록빛 온천수가 담긴 풍경은 볼 수가 없었다. 로마 시대에 온천으로 유명했던 이곳은 무분별한 개발과 줄어든 온천수로 지금은 거의 말라버렸다. 그나마 물이 고인 부분도 수질을 보호하기 위해 맨발로 잠깐 동안만 돌아볼 수 있게 해놓았다.
오히려 더 관심을 끄는 곳은 온천 뒤에 있는 히에라폴리스 유적지. 기원전 190년에 시작된 도시의 유적으로 1,200여 개의 석관묘와 1만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히드리안 황제 시절의 원형극장 등이 남아 있다. 온천에서 나와 언덕에 있는 원형극장으로 올라가던 중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고 세찬 소나기가 뿌렸다.
이미 반쯤 올랐던 터라 돌아가기도 뭣해 카메라를 가방에 넣고 계속 올라갔다. 비는 이내 잦아들었는데… 아, 그런데 저기 원형극장에 걸친 무지개. 그 무지개 아래로 양치기들이 양 떼를 몰고 가는 것이 보였다. 카메라를 꺼내려다 그만두었다. ‘저 풍경은 그냥 눈으로 찍어두자. 때론 이런 시간도 필요한 법이다.’
비는 금세 그치고 히에라폴리스에 장엄한 저녁이 찾아왔다. 2,000년 전의 유적을 어루만지는 노을. 양치기는 집으로 돌아가고 신전을 떠받쳤던 돌기둥과 쓸쓸히 남은 폐허 위에는 저물녘의 햇살이 내려앉고 있었다. |
터키 일주일간의 기록 ④ 카파도키아 & 이스탄불 |
화성을 닮은 풍경, 카파도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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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째 일정은 지독했다. 오전 6시에 호텔에서 나와 열두 시간 동안 미니 버스를 타고 카파도키아로 향했다. 오전 10시쯤 도로변에 있는 자그마한 휴게소에서 한국에서 가져간 즉석 라면을 먹었다.
음식을 갖다 준 종업원들은 일회용 나무젓가락을 보고 아주 신기해한다. 종이 포장지를 벗기면 나무 막대기가 나오고 그 나무 막대기가 다시 두 개로 갈라지고 그것으로 가느다란 면발을 집어 먹는 모습.
마치 신기한 서커스를 구경하는 듯하다. ‘여기서는 나무젓가락만 있다면 여행 경비는 걱정할 필요가 없겠군. 쇠젓가락으로 콩을 집는 묘기를 보여준다면 100리라 정도는 거뜬히 벌 수 있겠다.’
버스는 지평선을 따라 달리고 또 달렸다. 한국에서는 차를 타고 달려도 1분 이상 보기 힘든 지평선을 열두 시간 동안이나 보았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들판은 아득했고 들판에 심긴 꽃핀 벚나무와 매화나무, 그것을 뒤덮은 뭉게구름도 아득했다.
가끔 차를 세우고는 들판을 찍었다. 사다트는 ‘뭐, 이딴 걸 찍나’ 하는 듯한 심드렁한 표정이었지만, 한국이라는 좁은 땅덩어리에서 태어난 일행에게는 대관령목장 수만 개를 합쳐놓은 것보다 더 넓은 평원이 마냥 아름답기만 하다.
해 질 무렵에 카파도키아 우치히사르에 도착. 차에서 내리는 순간, 열두 시간의 이동으로 인한 피곤함은 눈 녹듯 사라졌다. 도토리를 엎어놓은 듯한 바위에 수천 개의 굴이 뚫려 있다. 약 300만 년 전 화산 폭발과 지진 활동으로 만들어진 응회암이 오랜 풍화작용으로 기이한 모양의 암석군을 만들어낸 것.
로마 시대 이래 탄압을 피해 그리스도 교도는 카파도키아로 피난을 왔고, 이렇게 굴을 파고 숨어 살았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살았고 지금도 정부의 허가를 받은 관광객이 호텔과 카페 등을 운영하며 살고 있다.
이튿날은 괴레메 지역을 벌룬을 타고 돌아봤다. 새벽 5시부터 기다리며 벌룬이 카파도키아 위를 날아오르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벌룬이 부풀어 오르고 허공에 뜬 순간 ‘아!’ 하는 탄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화성의 어느 골짜기를 비행선을 타고 날아다니는 듯한 기분이 이럴까? |
버섯을 닮은 바위가 10여 기 모여 있기도 하고 연노란 바위들이 울퉁불퉁 수십 킬로미터 가량 이어지기도 했다. 이런 모습은 괴레메뿐만 아니라 위르굽, 아바노스 등에 걸쳐 나타난다.
카메라 셔터를 쉴 새 없이 눌러 대는 한국 기자들을 보고 사다트는 ‘이제 포기했다’는 표정이다. ‘그래, 사다트. 서로에게 얼마간 포기를 할 때 너그러워지는 거야.’데린쿠유의 지하도시 역시 경이로웠다.
카파도키아는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땅’이라는 뜻이지만 역사는 그렇지 않았다. 이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땅’을 차지하기 위해 기원전 1200년경에는 히타이트 왕국, 리디아 왕국, 프리지아 왕국이 각축전을 벌였고, 이후 페르시아 왕국, 알렉산드로스 제국, 로마 제국 등 수많은 왕조가 거쳐 갔다. 비잔틴, 셀주크투르크, 오스만투르크도 카파도키아를 점령한 왕조였다.
이곳의 주민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굴을 뚫었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한 사람이 허리를 구부리고 겨우 지나갈 만한 굴이 수십 킬로미터나 이어진다. 가장 깊은 굴은 지하 80m까지 내려간다. 굴은 서로 이어져 도시가 되었다.
약 1,200개의 방이 있고, 음식을 준비하면서 나오는 연기가 지상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연기를 모으는 방을 따로 만들었다. 교회와 곡물저장소, 동물사육장, 포도주저장실도 완벽하게 갖추었다. 약 3만 명이 6개월간 살 수 있다. 여행객에게 개방되는 부분은 지하 8층까지. 내려가는 쪽 벽에는 붉은 화살표가, 올라가는 방향에는 푸른색 화살표가 그려져 있다.
데린쿠유의 지하도시를 벗어나 지상으로 나온 순간 내리쬐는 햇빛에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이런 비현실적인 현실도 실재한다. 여행은 비현실이 실재하는 현장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경이로운 작업이다. 터키에 오기 전까지 장장 두 시간이나 이어지는 매화나무 지평선이 있다는 것이 현실이라고 어떻게 생각했을까.
굿 바이 이스탄불 |
이튿날 카파도키아에서 수주크(터키식 소시지)로 유명한 카이세리로 이동, 카이세리에서 국내선을 타고 이스탄불로 이동했다. 힐튼 이스탄불 호텔에 도착한 시각은 밤 11시 30분. 다음 날 오전 8시 30분부터 이스탄불 취재다. 마지막 날까지 계속된 강행군.
이스탄불 국제공항 이륙 시간은 오후 7시 30분. 공항에 오후 4시 30분까지 도착해야 한다. 블루 모스크와 아야 소피아, 보스포루스 해협 요트 크루즈, 그랜드 바자르를 숨 가쁘게 돌아봤다. 스케치하듯 돌아보니 아쉬움만 남았다. 이스탄불만 제대로 보려 해도 적어도 2박 이상의 일정을 잡아야 한다.
아야 소피아와 사원 내를 수놓은 벽화, 맛있는 터키 음식이 가득한 음식점과 활력 넘치는 그랜드 바자르와 이스탄불의 거리…. 인천발 TK90편에서 와인을 두 병 마시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떴을 때 비행기는 인천국제공항 활주로에 서서히 내려앉고 있었다.
케코바의 투명한 물빛, 아폴론 신전에서 만난 터키 여학생들의 천진한 웃음소리, 에페소스에 울려 퍼지던 바이올린 소리, 히에로폴리스의 무지개와 노을, 카파도키아의 황톳빛 풍경 그리고 올리브와 올리브나무 사이로 난 길과 끝없이 이어진 완만한 언덕. 벌써 그리워지는 터키…. |
▒ Infomation 항공 터키항공(02-777-7055)이 매주 월·목·토요일 주 3회 운항한다. 대한항공(1588-2001)도 곧 주 3회 정식 취항할 예정. 인천국제공항에서 이스탄불까지는 11~12시간 가량 소요된다. 시차는 한국보다 6시간 늦다. 화폐 예테르(YTL)를 사용한다. 1USD=1.25YTL. 1유로=1.45 YTL. 우리 돈으로 850~900원 정도. 달러와 유로화 모두 사용할 수 있다. 기후·음식 현재 우리나라 봄 날씨와 비슷하다. 일교차가 크다. 카디건이나 얇은 재킷 정도는 준비해 가는 것이 좋다. 터키에서 꼭 맛봐야 할 음식은 케밥. 터키에서 케밥은 그릴에 굽는 모든 음식을 총칭한다. 케밥의 종류는 약 55가지. 터키 전통 술로는 라키가 있다. 소주처럼 맑은데 물을 부으면 우유처럼 변한다. 패키지 범한여행사(02-2001-4721), 세중여행사(02-2126-7621), 투어몰(02-311-4441), 현대드림투어(02-3014-2333) 등에서 이스탄불, 안탈리아, 카파도키아, 파무칼레, 에페소스 등을 돌아보는 ‘터키 일주 8일’ 상품을 판매한다. 가격은 130만~150만원. 기타 최근 터키 배낭여행 중 사망한 임지원 씨와 관련, 터키문화관광부 일한 오우즈 동아시아지역 국장은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Very sorry)”는 말을 전했다. 오우즈 국장이 당부한 유의 사항은 ▲ 많은 현금을 소지하거나 혼자 외진 곳을 다니는 일은 삼가고 ▲ 과도한 친절을 베풀면서 접근하는 사람을 경계할 것 ▲ 값비싼 소지품이나 히피 같은 눈에 띄는 복장을 피할 것 등이다. ▲ 만약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에는 전화 155번으로 터키 경찰에 긴급 구조 요청을 하면 된다. | |